(사진 = 중계 영상 캡쳐)
이변은 없었다. 전 세계가 탄식했던 이세돌의 충격적인 패배와 다르게 많은 사람이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 한 번의 세기의 대결로 기록될 인공지능 바둑 마스터 '알파고'와 인간계 바둑 최고수 '커제'의 3번기 대결이 3:0의 결과로 쓸쓸히 마무리된 직후의 모습이다.
'바둑의 미래 서밋'이란 이름으로 2017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중국 저장성 우전에서 펼쳐진 이번 대국은 알파고와 인간이 한팀을 이룬 '페어' 경기를 제외한 개인전, 단체전 모두 알파고의 승리로 기록됐다. 현 바둑계 최고수로 불리는 커제까지 잡아낸 이유에서일까, 알파고를 창시한 구글 딥마인드는 이번 경기를 끝으로 알파고가 바둑계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로기사를 상대로 한 총전적은 68승 1패. 압도적인 전적이다. 1패는 이세돌과의 5번기 중 네번 째 경기에서 신의 한 수를 뽐낸 이세돌이 안긴 유일한 패배다.
이에 국내 인터넷 여론에서는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긴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그러나 이번 대결과 알파고의 은퇴가 가지는 의미는 이보다 훨씬 크다. 단순히 '바둑' 그 자체보다 인공지능이 꺾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하고 활용해야 할 존재이자 도구로 보는 시선이 한껏 커진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사진 = 딥마인드)
2016년, 당시 알파고 1.0이 이세돌을 4대1의 압도적 스코어로 꺾었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온갖 이야기와 추측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과연 인공지능의 현재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정말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는 세상이 올 것인가(특이점,싱귤래리티),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모두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답은 '아직 멀었'다.
알파고에 대한 온갖 억측과 상상이 가미되며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범용 인공지능(대화가 가능하고 갖가지 상황에 대한 논리적 인식, 대응이 가능해 실제 인간처럼 동작할 수 있는 AI) 개발이 머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인공지능의 원리를 조금만 공부해봐도 이것은 아직 먼 미래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굳이 복잡한 구조나 원리에 대해 설명할 필요 없이 쉽게 말하면, 알파고를 비롯해 기계학습론 '딥러닝'을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 인공지능의 현재는 가르쳐준 것만 잘하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제시 분야에서 청출어람 하는 자체 학습 능력은 어마어마하지만, 딱 바둑이면 바둑, 체스면 체스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 밖의 세상에 대한 어떤 인지나, 감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바둑계에선 신의 경지에 오른 알파고에게 더 간단한 게임인 체스 한 게임을 주문하더라도 알파고는 단 한 수도 놓지 못한다. 아무 말이나 놓아볼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왜냐, 체스에 대한 학습 데이터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굳이 나이트 하나도 이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개탄하며 체스 룰을 익히려는 것도 아니다. 왜냐, 인간이 배우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현재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분야는 굉장히 제한적이다. 보드게임이나 각종 숫자, 문자같이 수치화나 분석이 상대적으로 쉬운 분야에 한해서다. 쉽게 가르치기 어려운 비정형 데이터 같은 경우 특징표현 학습 기법을 통해 스스로만의 기준을 만들어 갈 수도 있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과 높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인간 만큼의 사고 유연성이나 융통성이 없는 까닭에 출중한 분석 성능으로도 여전히 인간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해법이나 대응을 하지 못해 쩔쩔 매기도 하는 게 현재 수준이며, 앞으로도 오랜 시간 그럴 것이다. 인공지능이 오랜 빙하기 끝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은 것은 딥러닝과 빅데이터를 포함한 획기적인 특징 학습, 분석 기법이 개발된 덕이지 인간의 세밀함에 견줄 '강한 AI'는 여전히 요원하다.
( 이런 인공지능 로봇은 아직도 공상의 영역이다. 사진=픽사베이 )
그럼, 시간을 번 것인가? 마냥 좋아만 할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인공지능이 현재 수준으로도 인간을 능가할 수 있는 분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비슷한 응용을 통해 앞으로 이런 분야가 점점 많아질 것이고, 필연적으로 인공지능에게 대체될 일자리도 늘어갈 것이다. 지금처럼 가만히 기다린다면 더욱 차가운 현실로 다가올 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국은 단순히 진보한 바둑 대결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제3국이었던 알파고와 인간의 협동 경기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어떻게 머리를 맞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물론 수준 차이는 격심했을지 몰라도, 인공지능과 인간이 단순히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함께 협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경기였다. 단 한 톨의 감정도 없이 몰아붙이며 커제의 눈물까지 뽑아낸 알파고가, 자신의 수에 인간이 개입하자 당황한 듯 악수를 두는 모습은 약간이나마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 수도 있었다. 반대로 인간은 알파고가 두는 창의적인 수를 보며 사고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이다. 뛰어난 분석 능력을 토대로 기존의 룰을 깨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인공지능에게 배우는 것 말이다.
실제로 바둑계에서도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대국 이후 알파고의 수를 연구하는 기사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껏 인간이 두지 못했던 수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바둑 수준을 보다 높이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둑뿐만이 아니다. 이런 부분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질 수 있다. 인공지능이 찾아낸 새로운 방법, 이를 익힌 사람의 인간다운 융통성, 응용을 통해 더 큰 가치 창출, 이를 다시 인공지능이 배우며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선순환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이라고 볼 수 있다.
(데미스 하사비스 딥마인드 CEO, 사진 = 구글 코리아)
알파고의 이번 은퇴 소식은 이를 밑받침한다. 알파고 창시자인 구글 딥마인드 CEO 데미스 하사비스는 '이번 대국은 (특정 분야에 대한)인공지능의 최고 수준을 보여줌으로써 인류가 인공지능을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잠재력을 확인한 것'이라고 말하며 '인공지능은 인류가 새로운 지식영역을 발견하고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알파고를 기반으로 알고리즘 연구를 가속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을 개발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알파고의 은퇴가 알파고만의 승리로 남지 않기 위해 커제 9단과의 대국을 준비하며 치러진 50판의 셀프 대국 기보도 공개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알파고가 한 수를 결정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해당 작업은 커제 9단과 함께하며, 인공지능의 판단 근거가 사람과 얼마나 다른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보인다.
이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을 도우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질 때 최고의 가치를 다한다. 더불어 인공지능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결국은 기반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인간의 의지와 목적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결코 인공지능을 두려워하거나 경쟁해야 할 존재로 볼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우리를 도울 쓸만한 도구로 함께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인간에겐 인간의 영역이, 인공지능에겐 인공지능의 영역이 존재한다. 우리가 굳이 인공지능의 영역 한가운데 서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혹자의 말마따나 그것은, 포크레인과 삽질의 차이와도 같으니까. 그러나 무지막지한 포크레인을 다루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다. 그렇다고 포크레인이 모든 삽질을 대체한 것도 아니다. 미세하고 섬세한 부분, 인간이 더 잘하는 삽질도 존재하기에 포크레인과 삽은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인공지능이 언젠가 우리 예상보다 빠르게 진화하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인류가 불을 다루는 법을 깨우쳤듯 지금부터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다루는 법을 준비해 나간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이란 경쟁자가 아닌 또 다른 '불'을 얻게 될 것이다. 알파고의 완벽한 승리와 맹점, 정상에만 머무르지 않는 은퇴와 그 후의 청사진이 가지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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